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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하고 느슨한 행복~
이 름   형나미
제 목   헐렁하고 느슨한 행복~
홈페이지  
작성일   2004-07-13
조회수   4562
첨부파일     

촉촉히 봄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다섯 살배기 민서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입니다. 남편은 딱히 할 일이 없는지 자기가 민서를 데리고 오겠다 합니다. 생각해 보니 갓난쟁이를 재운 나도 별 할 일이 없습니다. 둘이서 집 앞 슈퍼 앞으로 나갑니다. 둘이 따로 우산 하나씩을 붙잡고 슈퍼 앞에서 아들을 기다립니다. 보랏빛 꽃을 피운 키 작은 라일락 나무가 비에 젖습니다. 향기도 다소곳이 비에 젖습니다.
노란 버스가 늦습니다. 하릴 없이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봄비 내리는 분위기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농가 부채로 시작해 내일 당장 입금해야 하는 카드값과 전기세와 전화세, 다음 주에 내야 하는 민서의 언어치료 수업료 이야기도 합니다. 
이윽고 노란 버스가 슈퍼 앞에 닿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선생님의 흥분한 목소리. “아버님, 들으셨어요? 민서가 아빠 보더니, ‘아빠’ 하고 크게 불렀어요.”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민서를 받아 안습니다. 다운증후군으로 인한 정신지체아인 민서는 이제 겨우 엄마 아빠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한 발성으로 엄마 아빠를 말하더니 며칠 전부터 정확한 뜻을 알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참 좋습니다
남편이 민서를 업습니다. 우산 하나는 접고 큰 우산 하나만 펼치기로 합니다. 
“에취.” 알레르기 비염이 있는 남편이 재채기를 합니다.“에취.” 남편 흉내를 내며 내가 재채기를 합니다. 까르르 민서가 웃습니다. 그 모습이 착하고 예쁩니다. 한 번 더 보고 싶어 일부러 흉내를 냅니다.
“에취…, 에취…, 에취….”
박자를 맞춰가며 재채기를 하니 민서도 박자를 맞춰가며 까르르 웃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두엄을 낸 논에도, 푸른 잎 무성한 마늘밭에도, 멀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 보리밭에도…. 

언뜻, 참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 식구가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마음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 순간이 참 좋구나, 생각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순간일 따름입니다. 둘째아이 산후조리를 막 끝낸 나는 푸석푸석한 얼굴에 펑퍼짐한 옷차림, 남편은 맨 발에 흰 고무신, 트레이닝복을 걸쳤습니다. 내일 당장 은행에 넣어야 할 돈도 적지 않고, 올해 안으로 집을 비워 달라는 주인의 요구도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좋다는 그 느낌을, 누군가 행복이란 말로 대신해도 되겠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서른여섯 살에 만난 행복입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팽팽하게 나를 옭아매었던 자존심과 성공에 대한 열망을 떠올려 보면, 이 행복은 가난하고 볼품없다 못해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저하지 않고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행복을 잴 수 있는 잣대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잣대는 간단합니다. 내 자신에게 “좋은가? 편한가?”라고 물었을 때, 단 몇 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불편하다면 그것은 내가 누릴 만한 행복이 아닙니다. 이십대에 쥐고 싶던 행복이 그랬습니다. 좋긴 했으나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머물고 있는 행복은 아무렇지 않은 것들인데도 참 좋고 편한 것들입니다. 화려한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온 식구 오순도순 지낼 만한 옛 흙집, 별로 남는 것 없는 유기농법이지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깨끗한 먹을거리, 영재 소리 듣는 똑똑한 아이는 아니지만 해맑게 웃는 정신지체아 아들, 그리고 나직이 드리는 할머니들과의 새벽기도, 많지 않아도 서로 나눠 먹는 밑반찬, 저녁이면 우리 집 처마 아래로 돌아오는 노란 도둑고양이까지…. 
마흔여섯 살에는, 또 쉰여섯 살에는 어떤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 알지 못하나 서른여섯 살에 만난 행복은 그렇게 나를 채우고 있습니다. 헐렁하고 느슨하게, 그러면서도 평화롭게…

글쓴이 추둘란은 충남 홍성에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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